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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부(木府)

나시족의 세습족장 목씨는 원,명,청 3개 조대를 걸쳐,22대,470년이란 시간을 통치하였고 명조때가 제일 번성한시기였다.고성안의 목부는 본래 여강의 세습족장 목씨의 관공서로 원나라(기원1271-1368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목부는 청나라 말기 전쟁으로 인해 훼손되였고 1998년 재건된 후 부내에 고성 박물관을 설립하였다.목부의 총 면적은 46무가 되고 축선을 따라 차례로“천우류방(天雨流芳)”패방,충의방(忠义坊),의문(仪门),의사청(议事厅),만권루(万卷楼),호법전(护法殿),광필루(光碧楼),옥음루(玉音楼),삼청전(三清殿),각루(阁楼),무대(戏台)등 15채에 크고 작은 162칸의 방이 있다.그 안에는 역대 황제가 친히 하사한 11개의 편액이 걸려 있고 목씨 가족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여강고성의 핵심으로 되고있다. 목부는 명나라 건축의 특색과 예술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으며 당송시기 건축특색도 고유한 목조(木雕) 건물이기도 하다.한족,백족,나시족의 건축기술을 기묘하게 이용하여 3민족의 동심동덕(同心同德) 단결의 상징이기도 하다.그리고 “청우류방”이라는 패방에 씌여진 네 글은 나시어의 “공부하러 가자”는 음과 유사한 발음으로서 나시족이 지식에 대한 숭배를 체현하고 있다.충의방은 또 석패방이라고 하는데 구조가 장엄하고 조각이 정밀한 충의방은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다.민간에는 “대리으 삼탑사,여강의 석패방”이라는 말도 있다.의사청은 단정하고 장엄한 세습족장의 국가 대사르 보는곳이다.만권루는 2천년 문화유산의 정화(精粹),천권의 동파경,백권의 라마교의 경전,세습족장의 시집,유명한 시인들의 서화(书画)등 예술의 보물로 가득하다.호법전은 또 후 의사청이라 하고 세습족장의 집일을 논의 하는곳이다.옥름루는 성지(圣旨-임금의 명령)를 받는 곳과 가무를 보며 즐기는 곳이다.삼청각은 세습족장이 도가의 정신을 숭배하는 산물이다.목부는 나시민족이 광법하고 다양한 물화를 접수하는 개방정신을 구현하는 곳이기도 하고 당시 목씨 가족의 생활과 교육,문화,역사,종교 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목씨 가족의 성쇠역사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목씨 토사(木氏土司)

남송시기의 이종(理宗)원년부터 청나라시기의 옹정(雍正)원년까지의 470년간 여강은 줄곧 목씨 토사(세습족장)가 통치하여왔고 총 22세대를 지속하여 왔다.1253년 구비라이가 10만 몽고군을 거느리고 세 갈래로 나뉘여 대리국을 토벌하였다.구비라이가 거느린 몽고군은 가죽 주머니(革囊)와 뗏목(木筏)을 타고 보산의 봉과(奉科)일대에서 금사강을 건넜다.여강의 부족 수령 아종아량(阿琮阿良)은 보산의 나루터에가서 영접하였고 몽고군을 협조하여 대리국을 정복하였으며 후에 관원으로 임명하였다.이로서 여강에 대한 470년간이라는 봉건영주세습통치가 시작되였고 최초의 아종아량이름으로 부터 아갑아득(阿甲阿得)까지 전해졌으며 명나라에 귀속되여 주가의 한 일원이라 하여 “주(朱)”에서 인(人)자를 뺀 “목(木)”씨라는 성을 받게 되였다.명나라에는 세습족장의 관공서를 허락하여 황제의 궁전과 같은 웅장하고 화려한 목부가 생기게 되였다. 명나라 말기는 세력이 한창 흥성한 시기였고 통치지역은 운남성의 서북부,사천성 서남부,티벳의 동남부 지역으로 지금 운남성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되였다.후에 목씨가족의 통치는 사회생산력의 발전은 점점 방해하였기에 1723년 “개토귀류(改土归流)” 『개토귀류는 원,명시기의 소수 민족의 영주가 세습 통치하는 제후령을 폐지하고 중국의 직할령에 편입하여 과거로 임용된 관료인 류관을 파견해 통치하는 지역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를 실시하였다.개토귀류의 실시는 목씨 토사의 통치가 끝났음을 상징하고 여강은 이로부터 봉건영주사회에서 봉건사회로 진입하게 되였다. 목씨 토사가 여강을 통치하던 4백여년간의 22세대의 토사는 중앙왕조에 대해 한마음으로 충성을 다했고 중앙정부를 도와 변경의 안정을 보장하였다. 명나라 중기에 와서 명조는 중앙의 집권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운남에 대해 개토귀류를 실시하였지만 여강은 1723년에 와서야 비로소 개토귀류를 하게 된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여강은 변경지대로 티벳과 가까우며 남쪽은 대리가 있는 독특한 위치로 인해 중앙정부에서 볼때 목씨 토사를 대표로 한 나시족은 변경의 단결과 안정의 중요한 요소로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다른 하나는 목씨 토사는 중앙에 대해 충심으로 충직하고 우환과 재난을 없애며 공물을 많이 바쳐 명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예를 들면 목증(木增)과 목의(木懿) 부자는 선후로 각 지방의 토산물,말 및 2만냥의 은을 공물로 받쳐기에 만력(万历)황제의 목증흠차(钦差)에게 “충의(忠义)”라는 두 글을 하사하여 그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하고 장려하는것이였다.그리고 목씨 토사는 한문화를 열심히 배웠고 중원의 문인·묵객들과의 교류도 많았다.오늘날 나시족은 중국에서 한문 수준이 비교적 높은 소수민족으로 된것도 목씨 토사의 한문화 숭상과 갈라 놓을수 없는것이다. 20여세대의 토사중에서 목증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목증은 학식이 풍부하고 무략도 있었고 변방 지역을 개척하였으며 인재와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목씨 통치시기의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각 민족인민들 중에서 신화같은 인물로 되였다.후에 목증은 명왕조의 불안정함을 미리 알라차려 관직에서 물러나 36살이 되는 해 삼림에 들어가 시를 읊고 진리를 논의하면서 살았다.그의 시는 “사고전서(四库全书)”등에 수록되였고 또 유명한 지리학가 서하객(徐霞客)을 여강에 요청하였으며 서하객여행기에 여강에 대한 보귀한 자료를 남겼다.

토사제도는 중국의 중앙 정부가 중국 국내의 소수민족의 토착 지바자들에게 부여하는 관직에 대한 총칭이고 이것은 직접 통치가 어려운 원거리,오지에 대한 중국의 간접 통치방식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주변의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에 대해 책봉-조공의 형식으로 군신 관계를 맺고 교류를 요구하는 정책으로 세력의 크기에 따라 왕호나 주,현의 지사직,군 지휘관의 칭호를 주었다. 원나라 이후의 토사는 중국 내의 소수민족 지배자가 개별적으로 중앙 왕조와 교류를 통해 주,현의 지사직이나 군 지휘관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청나라는 이것을 한층 더 세분화하였고 군 지휘관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을 “토사(土司)”,주,현의 지사직을 받은 사람들을 “토관(土官)”이라고 불렀다.토사와 토관의 토는 “토박이”라는 뜻이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에서 세습으로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말한다.과거를 거쳐 임관되는 관료는 출신지에 부임하는 것이 금비되여 임기가 다할 때마다 임지를 옮겨다니던 관료를 “류관(流官)”이라고 칭하는 것과 대비된 표현이다. 원명대에 이르러 소수민족의 영주가 세습 통치하는 제후령을 폐지하고 중국의 직할령에 편입하여 과거로 임용된 관료인 류관을 파견해 통치하는 지역으로 바꾸는 것을 “개토귀류(改土归流)”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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